LH공사가 개발한 한옥형 아파트 거실 풍경
슬로우 라이프(slow life)에 대한 관심 증가와 우리 문화에 대한 재조명 트렌드를 타고 한옥(韓屋)의 가치 상승이 이어지고 있다.
부동산개발업체나 지방 공기업들의 한옥마을 개발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LH공사와 민간 대형건설사들이 한옥형 아파트를 개발ㆍ공급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주택 수요자들이 개별적으로 한옥형 인테리어를 채용하면서 관련 자재ㆍ실내건축 업체들의 상품개발도 이어지는 모습이다. 민족의 명절 추석 연휴를 계기로 ‘한옥형 아파트’ 트렌드를 살펴본다.
△아파트 실내공간 점령 나선 한옥 시스템
LHㆍ대림, 전통 구조ㆍ인테리어 채용 앞장
LH공사는 올해 초 ‘한옥의 세계화’를 표방하며 현대적 아파트에 한옥 디자인을 접목한 ‘한옥형 아파트’를 선보였다. 한옥 한 채를 고스란히 아파트에 들여놓는다는 게 기본 컨셉트였다.
일단 한옥의 대표 구조인 ‘ㄱ’자형과 ‘ㄷ’자형을 채용하되 안방과 서재가 있는 기존 구조 대신 안마당과 사랑방, 누마루 등으로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전용면적 134㎡(약 40.6평)형에는 거실 자리에 방 크기의 마루가 들어서고 사랑방과 마루 사이에는 툇마루까지 놓인다. 평형과 관계 없이 현관을 열면 바로 마당이 나오고 툇마루를 지나 안방과 사랑방으로 연결되는 구조다.
창호와 마루, 벽지 등 내부 인테리어도 한옥식이지만 외부 디자인도 한옥식이다. 지붕은 기와 형태로 처리되고 아파트 저층부에는 돌 기단과 화방벽이 채용됐다. 단지 일대는 검은색 벽돌을 쌓아만든 전통 담장과 정자도 배치된다.
최근 과도한 부채 문제로 한옥아파트를 비롯한 상당수 사업이 지연되고 있지만, LH공사는 향후 전주시 만성동과 시흥시 목감지구, 강릉시 오죽헌 주변 등 전국으로 한옥형 아파트를 확대 공급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민간 건설업체 중에는 대림산업의 한옥형 인테리어 디자인이 눈에 띈다.
대림산업은 한국 전통의 미학인 비움과 채움, 선과 면의 세련된 요소를 현대적인 감각과 조화시켜 ‘한국식(Korean Style)’ 인테리어 디자인을 확보하고 현재 시공 중인 서울 용산 신계동과 중구 신당동 e-편한세상에 적용하고 있다.
이곳 e-편한세상은 현관에 전통 문 모양을 본뜬 나무 중문(中門)을 설치하고, 거실에는 한식 마루와 조각보 모양을 형상화한 우물천정을 디자인했으며, 방마다 격자무늬가 적용된 슬라이딩도어 및 같은 모양의 창을 배치해놓고 있다. 전체적으로 나무와 흙, 한지 등 한옥 마감재의 느낌을 최대한 살렸다.
LH와 대림 외에 상당수 민간 건설사들도 부분적으로 한옥 인테리어를 앞다퉈 채용하고 있다.
현대건설의 검단신도시 4차 힐스테이트는 시골집 평상을 응용한 다기능 거실공간을 채용했고, 중견 건설업체인 경동건설은 부산 해운대 우동의 제이드아파트에 툇마루와 한지 조명 등 한옥 인테리어를 도입했다.
쌍용건설은 대구 월배동 예가아파트에 정자와 나무다리가 포함된 전통 한옥 방식의 ‘원(園)’ 개념을 조경설계에 반영하기도 했다.
이밖에 이건창호가 완자살, 용자살 등 전통 한식창호의 디자인을 재해석해 ‘한식 시스템창호’를 선보인 것을 비롯해 실내건축 업계도 한옥식 인테리어 신상품 개발에 앞다퉈 나선 모습이다.
물론 여태까지 선보인 ‘한옥형 아파트’는 실내 인테리어를 한식으로 채용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LH공사가 ‘ㄷ’자ㆍ‘ㄱ’자 형태의 전통구조와 마당, 툇마루 등을 포함해 내놓은 설계안이 비교적 ‘전향적’이라는 평이지만 구조안전 상 황토 벽체가 아닌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채택했음은 물론이다. 이는 제한된 부지 내에 보다 많은 가구를 공급해야 사업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공간 효율성’ 문제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부동산시장 침체와 분양가상한제 등이 맞물린 가운데 전통방식 인테리어 자재의 공급가격이 건축비 부담을 상승시키는 부분도 한옥형 아파트 활성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건설업계 관계자들은 “한옥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일단은 토지가격 부담이 낮은 비수도권을 중심으로 한옥마을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개별 수요자들의 한옥 건축공사도 확산되고 있지만 고층아파트 내부로 한옥을 온전히 끌어들이는 작업은 아무래도 시간이 좀더 걸릴 것”이라며 “다만 앞으로도 한국인 정서를 가장 잘 반영하기 위해 고유 한옥의 개념을 아파트에 담아내려는 움직임은 계속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대림산업은 서울 용산구 신계동과 중구 신당동 e-편한세상에 ‘Korean Style 인테리어 디자인’을 적용, 한옥 시스템을 아파트 내부로 불러들였다. 위에서부터 △조각보 모양을 본뜬 우물천정과 한식 마루 패턴의 거실 △한옥풍 침실 △격자 창호에 한지 마감을 채용한 다실이 한옥의 느낌을 한껏 살려준다. 대림산업 제공.
LH공사는 50채 안팎의 한옥마을 조성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다양한 설계안을 마련해놓고 있다.
최근 LH 부채 문제로 사업추진이 다소 늦어지고 있지만 대형 공공기관이 한옥마을 조성사업을 부동산개발 프로젝트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시선을 끈다. LH는 4층 안팎의 저층아파트 내ㆍ외부를 한옥형으로 디자인해 공급하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LH공사 제공.
아파트를 한옥 안으로 초대하다
기존 아파트의 공간구조와 인테리어를 전통식으로 전환한 ‘한옥형 아파트’와 더불어, 기존 한옥에 현대식 아파트 설비를 적극 채용한 ‘21세기형 한옥’도 빠른 성장ㆍ발전을 보이고 있다.
기와지붕과 목조 부재, 황토벽체와 벽돌담장, 안마당과 누마루 등 기존의 한옥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하되 거실 공간을 현대화하고 욕실과 주방을 내부로 끌어들이며, 온돌 대신 아파트형 난방시스템을 도입한 것이 그것이다. 21세기형 한옥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한옥의 단점을 보완해 최신 창호설비를 채용한 것도 특징이다.
더불어 옛 한옥의 방 한 칸이 ‘사람 한 명 누워 발 뻗고 잘 수 있으면 되는’ 미니멀리즘 철학을 추구했다면 침대와 가구 등 수납공간이 필요한 현대적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방과 거실, 다용도실 등의 공간을 확대한 것도 눈에 띈다.
문제는 비용이다.
21세기형 한옥은 토지가격은 물론 평당건축비에서도 물론 어떤 주택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소요돼 비교적 여유있는 계층의 노후생활처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다만 최근 한옥인테리어 자재의 규격화와 공장생산, 표준설계안의 확산, 2~4층 다층형 설계안 개발, 전문기능인력 양성 기관의 급증 및 인건비 하락 등 여러가지 여건이 맞물리면서 점차 비도심지역의 일반적 웰빙주택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